서울의 조용한 공원, 평일 오전 10시.
햇빛은 나뭇잎 사이로 부드럽게 떨어지고, 사람 하나 없이 한적한 벤치 위에 중년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고운 베이지색 코트를 입은 그녀의 이름은 정연주, 올해 52세.
그녀는 매주 이 시간, 이 벤치에 온다. 아무 이유도 없이. 아니, 이유는 하나 있다.

그 남자를 보기 위해서다.
회색 바람막이에 낡은 운동화를 신은 남자. 그는 항상 10시 20분쯤 같은 길로 산책을 하며, 아무 말 없이 연주 옆 벤치에 잠시 앉았다가, 15분 후 아무 말 없이 떠난다.
처음 그를 본 건 1년 전 가을이었다.
딱히 특별할 건 없는 인상이었지만, 그날 그녀는 이상하게 그가 걷는 걸음과 앉는 자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점점 연주의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들어주었다.
이름도 모른 채 1년.
연주는 마음속으로 ‘그 사람’이라고만 불렀다.
이번 주에도 그 남자는 왔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항상 계시더군요.”
“저도요. 항상 오시잖아요.”
둘은 동시에 웃었다.
그리고 믿기지 않게, 두 사람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로 이름을 말했고, 나이도 말했고, 사는 곳도 알게 되었다.
남자의 이름은 강문호, 55세. 은퇴 후 근처에 살며 매일 산책을 한다는 평범한 남자였다.
이야기는 끊기지 않았다.
취향도 비슷했고, 인생에서 겪은 상처들도 묘하게 닮아 있었다.
둘은 따뜻한 차를 함께 마셨고, 연락처를 교환했고,
그날 이후 연주의 일상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두 달 후, 겨울.
둘은 작은 미술관 데이트를 마치고 공원으로 향했다.
눈이 살짝 쌓인 벤치 위에 앉아 연주가 말했다.
“참, 당신 말 안 한 거 있잖아요. 왜 매주 그 벤치에 앉았던 거예요?”
문호는 잠시 미소를 짓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쪽 때문이었어요.
당신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거든요.”
연주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말요?”
“15년 전, 한 신문기사에서 당신 사진을 봤어요.
남편분과… 사고 기사였죠.”
연주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그녀가 끝까지 외면하고 싶었던 과거였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숨졌고, 당시 그녀는 운전석에 있었지만 기억을 잃었었다.
“그걸… 어떻게…”

“왜냐면요... 그 사고,
제가 낸 사고였거든요.”
공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문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당신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매년 기도했어요.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용기가 없었어요.
그래서 그냥… 멀리서라도 지켜보고 싶었어요.”
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가운 공기보다 더 차가운 침묵이 두 사람을 갈랐다.
그녀의 입술은 떨리고 있었고, 손은 코트 속에서 움켜쥐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주가 입을 열었다.
“왜 지금 말한 거예요.”
“당신을 좋아하게 돼버렸거든요.
그 마음까지 거짓이면… 내가 너무 비겁한 사람 같아서.”
연주는 일어나서 눈 위를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돌아서 한 마디를 남겼다.
“이 벤치에, 다시는 오지 마세요.”
다시 봄이 왔다.
공원은 여전히 조용했고, 벤치는 그대로였다.
그 벤치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문호가 아니었다.
문호는 결국 지방의 작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심장질환이 있었다고 한다.
그의 유품 중엔 한 통의 편지가 있었다.

“당신을 사랑해서 죄송했습니다.
당신을 만나서 행복했습니다.
이 마음은 평생의 벌로 안고 가겠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땐 꼭 옆에 앉을 자격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연주는 편지를 가슴에 품고, 다시는 그 벤치에 앉지 않았다.
그 자리는, 이젠 그 남자의 자리였다.
| <짧은소설>“그 번호는 저장하지 마세요.” (1) | 2025.05.13 |
|---|